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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걷고, 뛰고, 넘고, 구르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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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가을도 좋고, 겨울도 좋고.]]></description>
        <language>ko-KR</language>
        <pubDate>Thu, 21 Aug 2008 15:17:2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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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어제의 노비와 오늘의 비정규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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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어제의 노비와 오늘의 비정규직 &raquo; 어제의 노비와 오늘의 비정규직고금변증설 / <p align="justify">조선 농민들은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신을 양반에게 헐값에 팔고 스스로 노비로 전락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노동력을 자본에 헐값에 팔고 비정규직으로 내몰리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양반과 자본의 횡포는 &lsquo;무죄&rsquo;이고 나라와 정치는 &lsquo;딴청&rsquo;이다. </p><p align="justify">흔히 옛날 문헌을 읽고 인용하지만 그 진위가 의심스러울 때가 적지 않다. 예컨대 &lt;조선왕조실록&gt; 같은 관찬 문헌은 어떤 정파, 혹은 당파가 실록을 편찬하느냐에 따라 기록의 출입이 적지 않고, 사건에 대한 평가도 사뭇 다르다. 문헌에 남은 것이라 해서 모두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옛 문헌 중에서 사실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고문서를 들 수 있다. 이것도 조작이 가해질 수 있다고 한다면, 할 말이 없겠으나, 그래도 고문서는 가장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친다. </p><p align="justify">예전에 고문서를 연구한 책이나, 고문서를 모은 책을 훑어보곤 했는데, 의외로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다. 그중 내 눈길을 가장 끈 문서는 &lsquo;자매문기&rsquo;(自賣文記)란 것이었다. &lsquo;자기 자신을 남에게 파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는 문서&rsquo;라는 뜻이다. 한두 가지 실례를 보자. 1862년 1월 서른한 살 된 사내 심성옥은 자신과 자신의 아내 복례, 그리고 앞으로 태어날 자신의 자식들을 50냥을 받고 원진사 집에 팔고, 자매문기를 작성한다. 문서 끝에는 차후에 만약 자신의 친척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이 문서를 증거로 내세우라는 말도 붙어 있다. </p><p align="justify">이 문서는 최승희 교수의 &lt;한국고문서연구&gt;에 나오는 것이다. 같은 책에는 자매문서 몇 장이 더 실려 있다. 1869년에 작성된 문서를 보면, 이미봉이란 사내가 흉년에 먹고살 방도가 없어서 자신과 자신의 딸을 돈 15냥에 아산군수를 지낸 김씨 양반에게 팔고 있다. 인신매매는 어떤 사회나 중죄인데, 이 경우는 자신은 물론 자신의 아내와 자식, 여기에 태어나지도 않은 자식까지 모두 노비로 팔아먹고 있으니, 중죄 중의 중죄라 할 것이다. </p><p align="justify">이런 중죄를 저지른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빈곤 때문이었다. 이런 부류의 자매문기가 적잖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에 가난에 시달리다가 자신과 가족을 부유한 사람에게 노비로 파는 사례가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더 들어보자. 1731년에 작성된 자매문기에, 한영이란 사람은 굶주리고 얼어 죽을 지경이 되자 자신의 11살 된 딸 분절이를 아무 대가 없이 김귀일이란 사람에게 노비로 넘겨주고 있다. 그런가 하면 1832년의 정정옥은 어머니의 장례 비용을 마련한다며 자기 아내와 자식을 돈 8냥과 쌀 한 섬을 받고 팔아넘기고 있다. 자신과 가족을 노비로 파는 사람은 당연히 양민이다. 이들이 만약 경작할 토지가 있다면, 당연히 자신과 가족을 팔지 않을 것이다. 농민이 토지를 잃고 쫓겨난 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무어니 무어니 해도 가장 큰 이유는 소수 양반지주의 토지 집적이었다. 박지원이 &lsquo;한민명전의&rsquo;에서 역설하고 있듯,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이 바닥나면, 나라에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라의 기민(飢民) 구제라는 것은 그야말로 언 발에 오줌 누기라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농민들은 자신이 경작하던 땅문서를 부잣집에 넘기고 곡식을 받아 연명한다. 이 기회에 부자들은 얼마 안 되는 곡식으로 안방에다 토지 문서를 차곡차곡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시 흉년이 들면 팔 것도 없고, 빚은 쌓이고 해서 땅을 떠나고, 마침내 자신과 가족을 파는 처참한 지경으로 전락하는 것이 농민의 운명이었다. </p><p align="justify">조선 후기 실학자들은 이 문제를 사회개혁의 핵심으로 생각했다. 경작하는 농민이 토지를 보유하는 것, 농민이 토지를 떠나지 않음으로 해서 사회를 안정시키는 것이 실학자들 최대의 관심이었다. 이익이나 박지원이 농민에게 일정한 토지를 분배해 주고 강력한 법을 제정해 그 토지는 절대 매매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이들의 견해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왜냐?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흡수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바로 조선의 지배층인 양반이었기 때문이다. 개혁이 될 리 만무했던 것이다. </p><p align="justify">토지를 헐값에 양반에게 건네준 양민은 마침내 자신의 신체와 영혼까지 양반 지주들에게 넘긴다. 그들은 자신의 몰락이 모순된 양반 지배체제에서 온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당장 자신과 가족을 사들인 양반지주에게 무한한 감사를 표했을 것이다. 이들의 은혜가 아니라면, 굶주려 산골짜기나 들판에 뒹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p><p align="justify">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사회에는 노비제도 같은 후진적 제도는 없다. 자신과 가족을 파는 사람도 없다. 대신 노동력 외에 다른 수단이 없어 오직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자 하는 사람은 엄청나게 많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면 빈곤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문제는 그 노동력을 구매하겠다는 쪽이다. 옛날 양반들이 굶주린 백성을 노비로 사들이거나 말거나 제 마음대로였듯, 이제 자본은 노동력을 사들이거나 말거나 자유다. 노동력을 팔지 못하는 젊은이가 도서관마다 넘치고, 자기 노동력을 제값에 팔지 못하고 궁핍에 전전긍긍 살아가는 비정규직이 수백만 명이다. 그들의 모습에 살기 위해 스스로를 팔아야 했던 조선시대 농민의 모습이 겹친다. </p><p align="justify"><br /> &raquo; 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정치가 소수층의 권력 유지를 위한 술책이 아니라면, 국민들이 비정규직의 구렁텅이에서 신음하고 있는데,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먼 산에 난 불을 바라보듯 왜 딴청으로 일관하시는가. 비정규직의 애절한 호소가 들리지 않는가. 이보다 더 시급한 문제가 없으니, 날마다 신문이며 방송에 이 문제의 해결에 골몰하는 정치인의 모습이 보여야 하겠지만, 그런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정말이지 대한민국에서 정치가 무엇인지를 나는 알 길이 없다. 아는 분들은 모쪼록 답을 가르쳐 주시기 바란다. </p><p align="justify">강명관/ 부산대 교수(한문학) </p><p align="justify"><br /></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역사]]></category>
            <pubDate>Sat, 16 Aug 2008 14:42:54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아름다운 영상보다 더 아름다운 마음씨.]]></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960361</link>
            <description><![CDATA[<p> </p><p></p><p> </p><p> </p><p> </p><p>보는 내내 이 로봇과 나를 비교하게 되는건 무엇때문일까.</p><p> </p><p>보는 내내 느껴지는 쓸쓸함, 그리움, 따뜻함, 그리고 사랑. </p><p> </p><p>특히나 전반부의 대사없음, 침묵속의 묵묵함. 너무 좋다. </p><p> </p><p>그 아름다움이란~~ </p><p> </p><p>올해 나온 국내산 블록버스터감독이 그런 말을 했다지, 이 영화는 오락물이라 스토리는 보지 말아달라구</p><p> </p><p>그런 영화일수록 스토리가 중요하다는걸 보여주는 영화. </p><p> </p><p>올해 나온 영화중 세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작품.</p><p> </p><p> </p><p>다시 보고싶다! </p><p> </p><p> </p><p> </p><p> </p><p></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p> </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예술]]></category>
            <pubDate>Sat, 16 Aug 2008 01:29:36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사진기의 새역사를 쓰다!!! 마이크로포서드]]></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659428</link>
            <description><![CDATA[SLR은 너무 무겁다. 작고, 가볍고, 화질 좋고, 렌즈까지 교환되는 카메라는 없을까? SLR 사용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상상해봤을 기술이 현실로 나타났다. 이 기술의 이름은 마이크로 포써드(Micro Four Thirds). 주인공은 올림푸스-파나소닉으로 대표되는 포써드(Four Thirds) 진영이다. <p style="line-height: 150%" align="center"></p><p style="line-height: 150%" align="center"> </p><p style="line-height: 150%">◆ 마이크로 포써드 시스템의 장단점</p><p style="line-height: 150%">새롭게 발표된 마이크로 포써드(Micro Four Thirds) 시스템은 기존 포써드와 동일한 크기(18 x 13.5mm)의 4/3 이미지센서를 사용한다. 하지만 반사미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이로인해 렌즈마운트와 이미지센서의 거리가 1/2로 축소돼 더 얇고 작은 크기의 카메라 제작이 가능하다. 또한 마운트 지름이 기존 포써드에 비해 6mm 줄어들었으며, 마운트 접점수는 9점에서 11점으로 늘어났다. 반사미러를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마이크로 포써드 시스템이 적용될 카메라는 SLR(일안 반사식) 방식이 아닐 것이 확실하며, &#39;렌즈를 교환할수 있는 콤팩트 디카&#39;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듯 하다. 기존의 포써드 렌즈군은 별도의 어댑터를 통해 사용할 수 있다.</p><p style="line-height: 150%" align="center"> </p><p style="line-height: 150%">이런 방식의 카메라는 작고, 가볍고, 화질 좋고, 렌즈까지 교환된다는 장점이 있으나 단점도 예상된다. 우선 광학식 뷰파인더의 사용이 불가능하므로 액정화면을 이용해 촬영해야 한다는 점이다. 라이브뷰가 일반화된 상황에서 액정화면을 보고 촬영하는 것은 확실히 편리하다. 하지만 햇빛이 강한 야외에서는 액정화면의 확인이 어렵다는 단점이 있다. 이런 문제는 EVF(전자식 뷰파인더)나 별도의 광학식 뷰파인더 등을 통해 해결할 것으로 예상된다. 별도의 광학식 뷰파인더의 경우 실제 촬영되는 이미지와 시차가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다.</p><p style="line-height: 150%" align="center"> </p><p style="line-height: 150%">또 다른 단점은 AF속도. SLR 방식의 경우 미러 아래쪽에 위치한 별도의 AF센서(위상차검출방식)로 초점을 잡는다. 이 방식은 빠르고 정확하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마이크로 포써드 시스템은 미러가 없으므로 별도의 AF센서를 사용할 수 없다. 촬영에 사용되는 4/3 이미지센서를 통해 콘트라스트검출 방식의 AF를 사용해야 하는데, 이는 별도의 AF센서를 이용한 위상차검출방식보다 속도가 느리다는 단점이 있다. AF속도를 얼마만큼 향상 시키느냐가 마이크로 포써드 시스템의 성공 열쇠다. 실제로 콘트라스트 AF 방식을 채택한 올림푸스 E-420의 라이브뷰 AF속도는 다른 제조사의 콘트라스트 AF방식 DSLR보다 빠른편이지만, 위상차검출 AF방식보다는 느린편이다.</p><p style="line-height: 150%" align="center"> </p><p style="line-height: 150%"> </p><p style="line-height: 150%">◆ 포써드 진영의 미래는?</p><p style="line-height: 150%">최근의 DSLR은 두가지 방향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하나는 이미지센서의 대형화이며, 다른 하나는 카메라 크기의 소형화다. 이미지센서를 대형화하면 카메라 자체의 크기도 커지므로 DSLR은 극과 극, 양방향으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셈이다.</p><p style="line-height: 150%">캐논 EOS 1Ds시리즈, EOS 5D 등이 35mm 필름과 동일한 1:1 이미지센서를 탑재하며 대형화에 앞장섰으며, 최근에는 니콘 D3, D700 등이 1:1 센서를 탑재해 경쟁에 뛰어들었다. 가을에 발표예정인 소니 a900과 캐논 EOS 5D의 후속기종까지 가세하면 1:1 센서 시장 경쟁은 한층 뜨거워질 전망이다.</p><p style="line-height: 150%">한편 보급형 DSLR 시장은 소형화, 저가격화가 가속되고 있다. 각 제조사에서 가장 저렴한 보급형 DSLR들은 저마다 가벼운 무게와 작은 크기를 자랑한다. 특히 다른 제조사보다 작은 포써드 이미지센서를 장착한 올림푸스와 파나소닉의 DSLR이 돋보인다. 올해 초 발표된 올림푸스 E-420은 작은 크기와 가벼운 무게로 여성 사용자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다. 작고 가벼운 25mm f2.8 펜케익 렌즈가 E-420의 인기에 일조했음은 물론이다.</p><p style="line-height: 150%">포써드 이미지센서는 35mm 대비 2배의 초점거리를 갖는, 비교적 작은 이미지센서다. 타 제조사들이 1:1, 1:1.3, 1:1.5, 1:1.6 등 다양한 크기의 이미지센서를 탑재한 DSLR들을 판매하는것에 비해 포써드 진영은 이미지센서의 크기를 고정시켜버렸다. 때문에 포써드의 발전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마이크로 포써드의 발표로, 포써드 진영은 자신들이 나아갈 방향을 정확하게 제시했다.</p><p style="line-height: 150%">작고, 가볍고, 화질 좋고, 렌즈까지 교환되는 확장성을 가진 고성능 디카. 디지털시대에 어울리는 발상이며, 이미 많은 사용자들이 마이크로 포써드의 등장을 반기는 분위기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살아있었다면, 이 작은 시스템을 들고 결정적 순간을 쫓으며 좋아하지 않았을까.</p><p style="line-height: 150%">&lt;&lt;이하 올림푸스 보도자료&gt;&gt; </p><p style="line-height: 150%">글로벌 기업인 올림푸스(Olympus Imaging Corporation)와 파나소닉(Matsushita Electric Industrial Co.Ltd.)이 함께 새로운 규격의 DSLR카메라 시스템 개발에 착수할 것임을 밝혔다. 이번에 발표한 DSLR 신 규격은 &lsquo;마이크로 포서드 시스템 표준&rsquo;으로 명명되었으며, 본체와 렌즈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이면서도 DSLR 특유의 이미지품질은 유지하는 시스템이다.</p><p style="line-height: 150%">올림푸스는 지난 2002년부터 DSLR카메라 시스템 &lsquo;포서드&rsquo;를 개발, 생산해 왔으며, 파나소닉은 2005년에 &lsquo;포서드&rsquo;진영에 합류하여 제품을 공동으로 개발해 왔다. &lsquo;포서드 시스템&rsquo;은 크기가 작은 4/3형 이미지 센서를 사용해 DSLR카메라 본체와 렌즈의 크기는 줄이고 휴대성과 이미지 품질은 높이는 시스템이다.</p><p style="line-height: 150%">&lsquo;마이크로 포서드 시스템&rsquo;의 가장 큰 장점은 DSLR카메라 시스템(렌즈 및 본체)의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포서즈 DSLR카메라와 동일한 4/3형 이미지 센서가 장착되기 때문에 이미지 품질은 동일하다. </p><p style="line-height: 150%">현재의 시스템과 세부적인 차이는 ①렌즈가 결합되는 부분인 &lsquo;마운트&rsquo;와 빛을 받아들이는 부분인 &lsquo;이미지센서&rsquo;까지의 거리를 약 50%이상 줄였다 것. 이 기술이 적용되면 DSLR카메라의 두께와 크기가 현재 생산되는 모델의 1/2수준으로 줄어들 전망이다. ②렌즈를 결합하는 &lsquo;마운트&rsquo;의 외부 직경을 6mm가량 줄여 광각 및 망원 렌즈의 크기를 현저하게 작게 줄일 수 있다는 것. ③렌즈와 카메라를 이어주는 전기접점을 9개에서 11개로 늘려 앞으로의 향후 디지털 렌즈 기술 발전에 대응했다는 것 등이다. 기존 포서드 렌즈와의 호환 문제는 렌즈어댑터를 통해 간단히 해결할 전망이다.</p><p style="line-height: 150%">올림푸스는 측은 &ldquo;시장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들이 아직도 DSLR 카메라 대신 콤팩트 카메라를 선호하는 이유는 DSLR카메라가 너무 크고 무거워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rdquo;라고 밝혀 DSLR카메라의 크기를 현격하게 줄여줄 &lsquo;마이크로 포서드 시스템&rsquo; 개발에 대한 기대를 드러냈다.</p><p style="line-height: 150%">현재, DSLR카메라 시장의 향후 발전 가능성은 매우 긍정적이다. 전세계 DSLR 카메라 시장의 규모는 전체 디지털 카메라 시장의 7%정도인데, 이는 과거 필름 카메라 시장에서 SLR 카메라가 RF카메라에 비해 훨씬 높은 시장 점유율을 차지했던 것을 감안한다면 매우 낮은 수치이기 때문이다. </p><p style="line-height: 150%">올림푸스와 파나소닉은 그 동안 &lsquo;포서드 시스템&rsquo;의 범주 안에서 다양한DSLR신기술을 개발, 기능적인 유행을 선도해온 바 있다. 렌즈를 통과한 빛을 받아들이는 이미지센서의 먼지를 자동으로 제거해주는 초음파 먼지제거 시스템과 콤팩트 카메라처럼 LCD를 보고 촬영하는 &lsquo;풀타임 라이브 뷰&rsquo; 등은 이들 양사가 세계 최초로 개발한 기술이다. </p><p style="line-height: 150%">올림푸스한국의 영상사업본부장 권명석상무는 &ldquo;독자기술인 &lsquo;포서드 시스템&rsquo;의 잠재력을 한층 더 확대한 &lsquo;마이크로 포서드 시스템&rsquo;을 기반으로 더 작아진 세계 최소형 DSLR 카메라를 만들어낼 예정&rdquo;이라며 &ldquo;기존 포서드 제품군과 함께 누구나 쉽고 가볍게 휴대하면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lsquo;모두의 DSLR&rsquo; 카메라를 생산해 낼 수 있을 것&rdquo;이라고 밝혔다.</p><p> </p><p style="line-height: 150%" align="right">다나와 유재석 기자 / heyju@danawa.com <br />기자블로그 : http://blog.danawa.com/js_yoo</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예술]]></category>
            <pubDate>Thu, 07 Aug 2008 09:37:03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스크랩] 전세계는 왜 다크나이트에 열광하는가?!]]></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524590</link>
            <description><![CDATA[<P align=center>이번주에 보니 미국에서 먼저 개봉한 다크나이트가</P><br><P align=center>역대 헐리우드 영화 최고의 기록으로 돌진중이라고 하더군요.</P><br><P align=center> </P><br><P align=center>WOW!!!!!</P><br><P align=center> </P><br><P align=center>역시나 화면보니 장난아니네요.</P><br><P align=center>국내에서는 잘 안보이던 미국판 TV spot 입니다.</P><br><P align=center> </P><br><P align=center>역시나 죽은 '히스레저'의 신들린 조커연기가 장난아닌듯  합니다.</P><br><P align=center>찌릿찌릿 - 간지 예술이네요.</P><br><P align=center> </P><br><P align=center>8월 6일</P><br><P align=center>극장으로 제일 먼저 갈테닷!</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예술]]></category>
            <pubDate>Mon, 28 Jul 2008 11:28:23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요즘 와닫는 글귀]]></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406124</link>
            <description><![CDATA[도대체 왜 지금 우리가 과학과 종교에 관해 이야기를 해야 할까요? 이것이 제 첫 번째 질문입니다.<br />  <br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미국의 이론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가 몇 년 전 &lt;뉴욕타임스&gt;에서 했던 말을 인용하면서 첫 번째 장문의 편지를 띄웁니다. 연말연시, 행복하시길 빌겠습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br />  <br />  종교가 있든 없든 선한 일을 하는 좋은 사람과 악한 일을 하는 나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악한 일을 하려면 종교가 필요하다. (The New York Times, April 20, 1999)<br />  <br />  2006년 12월 10일<br />  <br />  눈 내리는 보스턴에서<br />  장대익 올림 ]]></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삶]]></category>
            <pubDate>Thu, 10 Jul 2008 23:36:16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동아시아 분단선을 옮겨라]]></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371919</link>
            <description><![CDATA[동아시아 분단선을 옮겨라 한승동 기자  &raquo; 한승동의 동서횡단한승동의 동서횡단 / <p align="justify">냉전이 무너진 지 20년이 다 됐는데도 동아시아 분단선이 여전히 한반도 한복판을 달린다. 분단선을 없앨 수 없는 게 국제 현실이라면, 분단선의 위치를 바꾸기라도 해야 한다. 저들간의 세력다툼이 빚은 썩은 피고름을 왜 우리가 다 받아내야 하나. 분단선은 분단을 원하는 세력에게 넘겨줘야 한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그걸 거부하고 있다. </p><p align="justify">만약 친미적인 남한 주도로 한반도가 통일되고 북한이라는 완충지대가 사라지면 중국은 한반도와 마주한 서해 연안과 만주(동북삼성)에 엄청난 군사력을 배치해야 한다. 중국에 최대 위협세력은 한반도를 타고 오는 해양세력, 곧 일본과 미국이다. 그렇게 되면 중국은 경제&middot;군사 전략을 완전히 새로 짜고 막대한 국가 에너지를 동북 방위에 쏟아부어야 한다. 21세기 강성대국의 꿈은 그리되면 아마 멀어질 것이다. 북한이란 존재는 중국으로선 단순한 순망치한의 관계 이상이다. 중국은 북한 덕에 엄청난 국력 낭비를 덜고 있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그 비용을 북한이 몽땅 대신 치르고 있다. 중국이 북한의 붕괴를 막고 돕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북한은 그걸 알기 때문에 중국에 당당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만약 남한이 친미로 기울면 기울수록 중국으로선 북한의 가치가 더 올라가고 남한 주도의 남북 통일에는 더욱 반대하면서 분단체제 유지를 원할 것이다. </p><p align="justify">한반도 분단 최대 수혜국은 단연 일본이다. 미국을 배후로 소련&middot;중국 등 이웃 사회주의 적국들과 대치했던 일본한테 남한은 하늘이(실은 미국이) 내려준 완충지대였다. 남북한 동족이 마지막 고혈까지 짜내 반세기 이상 대리전을 치러주는 동안 미국의 동아시아 경영 발판인 일본은 미국의 안보우산과 경제 지원 속에 번영을 구가했다. 일본에 대한 미국 안보우산의 근간은 핵을 빼면 바로 남한의 기지화였다. 남한이 일본의 엄청난 안보 비용을 대신 고스란히 떠안은 셈이 된다. 이 희대의 부조리극 연출자는 미국이고 돈을 챙긴 건 일본이었다. 일본의 전후 경제 기적은 그런 조건 위에서 비로소 가능했다. </p><p align="justify">남북이 아둔한 적대적 소모전을 중단하고 손을 잡는다면 동아시아 분단선은 한반도를 떠날 수밖에 없다. 그 순간 부조리극은 끝나고 한반도는 해방된다. 그 결과 한반도에 어느 이웃도 쉬 넘볼 수 없는 독자적 힘을 지닌 안정적인 통합국가가 등장하는 것이 동아시아 전체의 안보와 평화 유지에 필수적이다. </p><p align="justify">만일 동아시아 분단선이 대한해협으로 옮겨간다면 남북한의 에너지 낭비는 급감하고 대신 일본은 엄청난 국력을 거기에 쏟아부어야 한다. 그리하여 선택에 내몰릴 것이다. 계속 미국을 등에 업고 강력해진 동아시아 대륙과 적대할 것이냐, 아니면 한반도를 포함한 이웃 대륙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미국 식민지 노릇을 그만둘 것이냐. </p><p align="justify">이런 동아시아 국제관계 재편은 남한이 북의 동족 및 균형외교를 외면하고 친미 일변도로 가는 한 불가능하다. 불행하게도 이명박 정부는 바로 그 길을 택한 듯하다. 그들이 꿈꾸는 북한 흡수통합을 통한 분단 해소를 중국은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실현 가능한 것은 분단선을 일단 한반도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폐악의 일부라도 가해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이 역사적 정의에도 부합한다. 한승동 선임기자 <br /><br /></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사회]]></category>
            <pubDate>Sat, 05 Jul 2008 21:30:32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소울메이트 남친과 헤어지고 듬직한 남편감 만났는데…]]></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371917</link>
            <description><![CDATA[소울메이트 남친과 헤어지고 듬직한 남편감 만났는데&hellip;[매거진 Esc]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 &raquo; 결혼은 거래다, 아서라Q 소울메이트 남친과 헤어지고 듬직한 새 남편감 만났는데 통하질 않아서&hellip; <p align="justify">갓 서른이 된 직장 여성입니다. 얼마 전 남친과 헤어졌습니다. 섬세하고 모든 면에서 잘 통해 소울메이트라 여기며 부모 반대 무릅쓰고 7년 열애했던 뮤지션 지망생이었지만, 2년 전 제 남동생의 죽음 후부터, 듬직한 남편 데려다 가족의 빈자리를 메워 놓아야겠단 강박관념이 생기더군요. 2년을 끌다, 새 남자 만났습니다. 솔직하겠습니다. 사시 패스해서 군법무관 3년차. 곧 판검사 될 사람이라 멋져 보이는 것도 있었고 연말연시 분위기에 초반 한 달은 둥둥 떠다녔습니다. 그러나 그 후, 매일 밤 고민합니다. 저랑 너무 다르거든요. 매번 불같은 연애했던 저랑 달리 연애경험 한번 없는 그. 문화와 사교가 중요한 저와는 달리 독서&middot;여행&middot;영화&middot;공연 경험은 물론 사진조차 찍어본 적도 없는 무취향의 그. 친구도 없고 주말엔 집에만 있으며 절 좋아한다는 말 이외엔 화제 자체가 없습니다. 통화해도 할 말이 없어요. 정말 많이 답답합니다. 저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굉장히 끌리고 심지어 내가 버리지 않는 한 날 버리지 않을 거란 희한한 확신까지 듭니다. 하지만 최근엔 하도 답답해 옛 남친을 만나 하소연까지 합니다. 이 통하지 않는 느낌, 불통, 고쳐질까요? 정들기 전에 정리해야 할까요. 개인적으론 고쳐져서 잘 지냈으면 좋겠어요. 좋은 사람이거든요 &hellip;. 어쩌면 좋나요. </p><p align="justify">A 0. 감성적 교감은 충만했으나 사회적으로 취약했던 남친과 이별 후, 직업적 안정과 지위 갖췄으나 커뮤니케이션할 수 없는 새 남자, 만났다. 과연 새 남자와 맺어질 수 있겠냐. 듬직한 남편감인데 소통이 전혀 안 된다 이거지. 거 문제는 큰 문젤세. 뭐가 문젠가. 따져 보자. </p><p align="justify">1. 먼저 일반론 하나. 결혼, 잡소리 다 걷어치우고 알맹이만 보자. 대체 왜 하나. 혼자서는, 불완전해서, 하는 거다. 정서적으로든 생물학적으로든 사회경제적으로든. 그 맥락에서 결혼은 본질적으로 거래다. 제 존재의 불완전을 상대의 자산으로 보정하는 거다. 하여 우리 모두는 끊임없이 대차 대조 한다. 상대의 보유 자산이 과연 내게 교환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타산을 속물적이라 타박하는 건 착각이다. 정작 비탄해 할 것은 그렇게 교환 가치를 지닌 것들의 목록이, 우리 사회에선, 천박할 정도로 단조롭고 물질편향이란 사실일 뿐. 애초 호혜적 이문 없는 관계란 지속 불가능한 게 자연의 법칙이다. </p><p align="justify"><br />2. 이제 당신 이야기. 우선 듬직한 남편 들여 가족 내 상실감 보상받으려 했던 당신의 강박은, 납득할 만한 애도반응이요, 방어기제다. 그렇게 가족을 복원하려는 데, 옛 남친이 바로 그 가족으로부터 인증받지 못해 왔단 사실은 중대한 하자가 될 수밖에 없는 거고. 새 남자에게, 스스로도 의아할, 상당한 호감 느낀 것 또한 당연하다. 옛 남친의 결격 사유가 곧 새 남자의 셀링포인트니까. 더구나 새 남자의 라이프 스타일이 극히 단선적이라는 건 그 남자의 사고와 행동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높다는 거고, 그건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삶에서 상당한 미덕이 된다. 당신이 배신의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도 그래서인 거고. 그렇게 당신이 옛 남친과 이별하고 새 남자에 끌리는 건, 우여곡절이야 왜 없었겠냐만, 자연스러운 프로세스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다. </p><p align="justify">3. 결혼은 언제 실패하나. 거래에 실패할 때 실패한다. 역시 이해타산이 아니라 순수한 사랑이었어야 했단 식의 주말드라마는 낭만적이긴 하나, 착각이다. 실패는 타산 자체에 있는 게 아니라, 그 타산의 목록이 잘못됐던 데 있는 거다. 자신에게 교환가치가 있는 게 뭔지 스스로도 몰랐던 게지. 지가 언제 행복한지도 모르면서 남들 목록만 베끼고 자빠져 있는 인생이 태반이니까. 결혼의 불행은 그러니까 거래, 해서가 아니라 그 거래에, 실패해서 오는 거다. 고로 결혼의 지속에 있어 가장 중요한 건, 주고받는 것, 그 교환 목록의 밸런스다. 그 거래의 균형이 무너지면, 결혼도 무너진다. </p><p align="justify">그런데. 그렇게 손해나는 결혼보다 더 불행한 게 있다. 아예 거래할 게 없는 결혼이다. 당신 경우 보자. 물론 판검사란 직위, 관계에 대한 로열티란 덕목은 훌륭한 교환가치 지닌다. 근데 당신이 삶에서 원하는 것들의 목록 전체가 그 두 가지만으로, 통합결제 되는 건가. <br /> &raquo; 김어준의 그까이꺼 아나토미그럴 수 있단 오해, 많이들 한다. 하지만 결혼은 에피소드 한두 개로 매듭 나는 단막극이 아니다. 마뜩한 결론도 없이 평생 틀어놔야 할 연속극이라고. 그 무지막지한 주야장천 평생생활극에서 당신과 그 사이엔 서로 주고받을 것들의 목록이 너무 적다. 취향이 다른 건 좋다. 하지만 취향을 의지로 만들어낼 순 없는 거다. 화제의 부족이나 대화의 절대량도 사실은 문제가 아니다. 그렇게 소통이 안 될 때 진짜 문제는 화제가 부족한 게 아니라 외롭다는 거다. 불통은 독백보다 외롭다. 아서라. </p><p align="justify">PS - 거래에 실패한 결혼의 결말은 그래서, 고독이다. 그 삶의 공복감은 밥으로는, 안 채워지고. </p><p align="justify">김어준 방송인<br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br /></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삶]]></category>
            <pubDate>Sat, 05 Jul 2008 21:29:05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19세기 ‘선전관(先錢官)’과 21세기 ‘강부자’]]></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371913</link>
            <description><![CDATA[[고금변증설] - 19세기 &lsquo;선전관(先錢官)&rsquo;과 21세기 &lsquo;강부자&rsquo; 조회(43)칼럼/논평 | 2008/03/07 (금) 21:00 추천하기(0) |스크랩하기(0) 19세기 &lsquo;선전관(先錢官)&rsquo;과 21세기 &lsquo;강부자&rsquo;<br />[고금변증설] <br /><br />강명관/부산대 교수&middot;한문학 <br />출처 : &lt;한겨레&gt; 2008년 03월 07일 <br /><br /><br /> &raquo; 고금변증설고금변증설 / <br /><br />우리의 상식적 역사 지식은 18세기 영조 정조 시대를 조선 후기의 르네상스니 진경시대니 하면서 한껏 추어올린다. 그럴듯하다. 실학이 이 시대의 산물이고, 어지간히 알려진 문인, 학자, 예술가 등도 모두 같은 시대의 인물들이다. 여기에 정조가 10년만 더 살았더라면 조선이 스스로 근대로 향하는 길을 걸어갔을 것이라는 주장도 종종 들린다. 모두 듣기 좋은 이야기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한 이후 조선이란 나라는 정말 엉망이 된다는 것이다. 개혁이니 뭐니 하는 것도 정조 시대가 마지막이다. 이후 조선사회는 불치병을 앓는 환자처럼 하루하루 연명하다가 마침내 식민지가 되는 치욕을 겪는다. <br /><br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까지 살았던 문인 윤기의 문집 〈무명자집〉에 &lsquo;정상한화&rsquo;란 에세이가 실려 있는데, 1800년 이후의 이 이상한 사회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펼치고 있다. 이 에세이의 몇 토막을 읽어보자. 윤기는 19세기에 와서 관료시스템이 붕괴하였음을 곳곳에서 증언하고 있다. 예컨대 이렇다. <br /><br />&ldquo;지금 과거를 관장하는 시험관이 된 자들은 과거를 모두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선심을 쓰는 도구로 알고, 인사고과를 담당하는 벼슬아치들은 관직을 자기 당파의 사유물로 여긴다. 혹 권세가에 나이가 많은데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사람이 있다 치면 음사(蔭仕)로 기름진 고을의 수령 자리를 내준다. 이 때문에 권세가에서는 벼슬을 하지 못하고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고, 낮은 벼슬자리에 머물다 죽은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rdquo; <br /><br />조선은 알다시피 양반관료사회다. 곧 사회와 국가를 지배하고 운영하는 주축이 관료란 말이다. 이토록 중요한 관료이므로 그 선발과정이 공정해야 함은 물론이다. 하지만 19세기에 접어들면서 관료시스템 자체가 소수 당파, 소수 권력가의 사적 이익을 도모하는 수단으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윤기는 계속해서 말한다. <br /><br />&ldquo;지금 세상에는 과거로 말하자면 한미한 집안 출신은 무슨 착오의 결과로도 요행히 합격하는 경우가 결코 없고, 벼슬자리로 말하자면 빈천한 사람이 우연하게라도 낙점을 받는 경우가 단 한 번도 없다. 과거에 합격한 집안에서만 과거 합격자가 나오고, 재상을 지낸 집안에서만 재상이 나오고, 장수가 나온 집안에서만 장수가 나온다. 무엇 때문인가. 과거 답안지는 원래 풀을 발라 봉하는 것이지만 몰래 자기들만 알아보는 표를 해 놓아, 백 번의 시험을 쳐도 한 번의 실수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벼슬길에 오르기만 하면 아침에 이 벼슬을 하다가 저녁에 저 벼슬로 옮겨서 승진을 번개처럼 거듭하면서 출셋길을 내달린다.&rdquo; <br /><br />과거는 시험이다. 시험의 생명은 공정성이다. 하지만 문제의 출제자가 자기 숙부이고, 그 채점자가 자기 외숙이라면 어떤가. 공정할 것 같은가. 답안지에 자기들만 아는 비밀표시를 해 놓고 채점할 때 후한 점수를 주면, 아무리 좋은 답안지를 쓴 사람도 당할 재주가 없다. 일단 벼슬길에 들어서면, 인사고과를 맡은 사람이 다 친척들이다. 벼락출세는 이미 떼놓은 당상이다. 요컨대 소수 가문, 소수 당파가 국가 권력을 사유화했지만, 그것을 감시하거나 비판할 시스템이 부재했던 것이 19세기 조선의 상황이었다. 이것이 곧 사회와 국가의 황폐화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br /><br />국가권력의 사유화는 매관매직, 곧 &lsquo;관직 판매&rsquo;라는 희한한 현상을 낳았다. 역시 &lsquo;정상한화&rsquo;의 한 토막이다. 하루는 윤기에게 친구가 찾아와서 이런 말을 한다. &ldquo;요즘 세상의 이른바 벼슬아치를 내직이거나 외직이거나, 높은 자리이거나 낮은 자리이거나 가릴 것 없이 모두 &lsquo;선전관&rsquo;(宣傳官)이라고 한다는데 자네는 들어보았는가?&rdquo; 선전관은 임금의 명령을 전하는 일을 맡는 무반직으로서, 임금을 가까이 모시기에 무반직 중에서는 청요직으로 손꼽힌다. 선전관을 지내야 무신으로서 출세를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윤기가 몰랐을 리 없다. 그래서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자, 그 사람은 이렇게 답한다. &ldquo;&lsquo;선전&rsquo;(宣傳)이란 곧 &lsquo;선전&rsquo;(先錢)이라네. 요즘 벼슬을 하려는 사람은 모두 벼슬하기 전에 돈을 먼저 바쳐야 하고, 또 벼슬에 올라서도 역시 돈을 우선시해야 하는 법이네. 그래서 모든 벼슬을 선전관(先錢官)이라고 한다네.&rdquo; 친구의 친절한 설명은 이어진다. 백성을 쥐어짤 수 있는 좋은 수령직에 임기를 다 채우고도 계속 있고 싶으면 감사나 대신에게 돈을 바치고, 나쁜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어도 돈을 바치면 된다. 발령을 내고 옮기고 하는 그 모든 인사이동이 모두 돈으로 이루어진다. 모든 관직이 돈을 앞세운다 해서 선전관인 것이다. 요컨대 이와 같은 소수 세력에 의한 국가권력의 사유화, 그리고 매관매직이 관료국가의 시스템을 붕괴시켰던 것이고, 그 결과 조선은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 <br /><br />지금은 19세기가 아니다. 매관매직 따위는 당연히 있을 수 없다. 하지만 과연 걱정할 거리가 없을까? 이명박 정부의 장관 후보자 프로필을 보고 &lsquo;고소영&rsquo;이니 &lsquo;강부자&rsquo;니 하는 우스갯말이 그치지 않는다. 부적격한 후보자 몇 사람만 낙마시키면 문제가 끝날 것인가. 아마 아닐 것이다. 누구를 선택해도 비슷한 속성의 사람이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분명한 것은 돈과 권력, 학벌과 인척관계로 결합한 극소수 지배층의 한국 사회 지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들이 어떻게 그렇게 많은 돈을 벌었는지, 외국 국적을 가진 자녀를 두고 있는지, 왜 특정 대학 출신들인지 묻는 것조차 이제는 어리석다. 이런 속성의 고소영과 강부자가 지배하는 세상이라면, 21세기 대한민국은 정확하게 19세기 조선의 연장이다. 세상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br /><br />]]></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역사]]></category>
            <pubDate>Sat, 05 Jul 2008 21:24:58 +0900</pubDate>
        </item><item>
            <title><![CDATA[병자호란 다시 읽기(1) 10만 포로의 눈물]]></title>
            <link>http://www.cyworld.com/leopcshop/334716</link>
            <description><![CDATA[<p> </p><p> </p><p> </p><p>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70111001011&amp;spage=5</p><p> </p><p style="margin-top: 13px">[병자호란 다시 읽기] (1) 10만 포로의 눈물 </p><p style="margin-top: 17px"></p>조선은 왜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하는 비참한 환란을 겪어야 했을까. 한마디로 17세기초 명&middot;청 교체기의 격랑 속에 조선 지배층이 국제정세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다.2007년은 병자호란이 끝난 지 370년이 되는 해이다. 북핵 문제를 놓고 6자 회담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듯, 지금 이 순간에도 한반도를 둘러싼 안팎의 정세는 예측불허다. 우리가 과연 북한은 물론 미국과 중국&middot;러시아&middot;일본 등과의 숨가쁜 외교전에서 북핵이나 자유무역협정(FTA) 등의 난제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미래를 당당하게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 병자호란을 살피는 것은 단순히 &lsquo;과거의 역사&acute;를 되돌아보자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와 한민족의 운명에 외교가 얼마나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지 되짚어보기 위해서이다. 명지대 사학과 한명기 교수의 눈을 통해 &lsquo;병자호란&acute;의 안과 밖을 살펴본다. 역사평설 &lsquo;병자호란&acute;이 매주 목요일 연중기획으로 독자를 찾아간다. <p>편집자 주 </p><p> ▲ 청태종 송덕비<br />병자호란 이후 청이 조선에 강요해서 세운 청 태종 송덕비. 병자호란의 전말을 적었다. 사진은 일제시대에 촬영된 것으로 당시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 송파리 삼전도에 있었다. 현재도 삼전동에 있으며 사적 101호로 지정돼 있다. ●준비 없이 전쟁을 선택하다 </p><p>1636년(인조 14년) 봄. 조선 조정에서는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인정하느냐의 여부를 놓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같은 해 3월, 청의 수도인 선양(瀋陽)에서 누르하치의 여덟째 아들 홍타이지(皇太極)가 황제로 즉위한다는 소식이 조선에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p><p>척화파(斥和派) 신료들은 &ldquo;개&middot;돼지만도 못한 오랑캐 추장에게 황제 칭호는 가당치도 않다.&rdquo;며 &ldquo;정묘년(丁卯年,1627년)에 그들과 맺은 맹약을 파기하고 전쟁도 불사해야 한다.&rdquo;고 외쳤다. 그들은 이어 &lsquo;황제 운운&rsquo;하는 내용을 담은 국서를 가져온 청나라 사신 용골대(龍骨大)의 목을 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p><p>반면 주화파(主和派) 신료들은 &ldquo;청이 명을 능멸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진 현실을 인정하여 그들의 요구를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사신을 박대해서도 안된다.&rdquo;고 맞섰다. 최종 결정권자인 국왕 인조는 양자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척화파의 손을 들어주었다. </p><p>그런데 곧 이어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났다. 조정이 청과 맺은 맹약을 파기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장차 발생할지도 모르는 청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내용으로 인조가 평안감사에게 보내는 극비교서(敎書)를 가져가던 금군(禁軍) 전령이 용골대 일행에게 교서를 빼앗긴 사건이었다. 자신의 목을 치라는 험악한 분위기에 놀라 황급히 달아나고 있던 용골대 일행에게, 다른 곳도 아닌 조선 영토 안에서 국왕의 밀찰(密札)을 빼앗긴 것이다. 척화냐, 주화냐를 놓고 정쟁만 무성했던 와중에 정작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어지는 정보 전달체계가 부실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p><p> </p><p>1636년 12월6일. 청군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질풍같이 내달렸다. 병자호란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병력을 의주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대로(大路) 바깥에 위치한 산성들 속으로 집결시켰던 조선군은 청군의 침입 사실을 제때 알아차리지 못했다. 청군이 조선군과의 접전을 피해, 곧장 서울로 진격하는 속전속결의 전략을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 와중에 임진강 이북의 방어를 책임진 도원수 김자점(金自點)은 청군이 침입했다는 최초의 보고를 묵살하고 조정에 제때 알리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적이 다가오자 싸우지도 않고 도주해 버렸다. 청군이 이미 개성을 지나 양철평(良鐵坪-지금의 은평구 녹번동)에 이르렀다는 소식이 전해진 12월14일. 서울 도성은 공황 상태에 빠졌다. </p><p> 아이들과 노약자들, 부녀자들의 울부짖음속에 피란행렬이 줄을 이었고, 조정 신료들도 어찌할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인조는 왕실 가족들과 종묘에 모셔져 있던 역대 국왕의 신주(神主)들을 강화도로 먼저 옮기도록 했다. </p><p>이어 자신도 강화도로 들어가려 했으나 청군이 이미 김포에서 강화로 이어지는 길을 차단해 버렸다. 인조는 어쩔 수 없이 남대문까지 갔다가 강화도 행을 포기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p><p>●&lsquo;돼지&acute;에게 무릎을 꿇다 </p><p>1637년(인조 15년) 1월 중순. 준비 없이 들어왔던 남한산성의 상황은 참혹했다. 청군이 산성을 완전히 포위했고, 삼남으로 이어지는 모든 도로를 차단했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 군량이 점점 바닥을 드러냈다. </p><p>청군은 연일 서양식 최신 대포인 홍이포(紅夷砲)를 쏘아대면서 항복하라고 종용했다. 조선 조정이 목이 빠져라 고대하던 지원군은 오지 않았다. 혹독한 추위 때문에 동상에 걸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성을 지킬 의욕을 잃은 장졸들 가운데는 항복하자고 시위를 벌이는 자들까지 나타났다. </p><p>그 와중에도 신료들은 척화와 주화를 놓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인조는 눈물을 보이며 대책을 호소했지만 뾰족한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p><p>1월26일.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청군은 바다에 익숙하지 못하여 수전(水戰)을 치를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강화도 조선군 지휘부의 방심이 불러왔던 결과였다. 청군은 이에 앞선 1월22일, 조선에서 노획한 선박에 홍이포까지 싣고 강화도에 대한 상륙작전을 벌였다. 조선군이 변변한 저항도 해보지 못한 채 강화도는 함락되었고, 피란했던 왕실 가족과 중신들은 전부 포로가 되었다. </p><p>강화도의 함락 소식은 남한산성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 놓았다. </p><p>1월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이윽고 그는 높다란 수항단(受降壇) 위에 앉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항복의 예를 바쳤다. </p><p>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세번 큰절을 올리고, 한번 절할 때마다 세번씩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리는 오랑캐식 항복 예식이었다. </p><p>원래 조선의 지식인들은 홍타이지를 포함한 여진족들을 인간이 아닌 &lsquo;금수(禽獸)&rsquo;로 경멸했다. 일부 인사는 심지어 청 태종을 &lsquo;황태극(皇太極)&rsquo; 대신 홍태시(紅泰豕)라고 불렀다.&lsquo;붉고 큰 돼지&rsquo;란 뜻이다. 그런데 인조가 &lsquo;인간&rsquo;도 아닌 &lsquo;돼지&rsquo;에게 무릎을 꿇는 치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p><p> 청 태종은 인조로부터 항복을 받은 뒤 사로잡은 포로들을 이끌고 철수길에 올랐다. 그러면서 인조에게 또 다른 다짐을 받아냈다. </p><p>&ldquo;내가 끌고 가는 조선인 포로들 가운데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도망치는 자는 불문에 부친다. 하지만 압록강을 건너 단 한발짝이라도 청나라 땅을 밟은 뒤에 도망쳐 오는 포로는 조선 조정이 도로 잡아 보내야 한다.&rdquo; </p><p>무시무시한 약조였다. 날이 갈수록 영토는 넓어지는데 인구가 부족했던 청은 조선인 포로들을 보배로 여겼다. 그들은 훌륭한 노동력이자 값을 받고 팔 수 있는 &lsquo;물건&rsquo;이었기 때문이다. </p><p>청은 10만이 훨씬 넘는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막기 위해 인조로부터 이같은 다짐을 받아냈던 것이다. </p><p>훗날 실제로 청에 끌려갔다가 탈출해 왔던 포로들은 이 &lsquo;약조&rsquo; 때문에 청으로 다시 박송(縛送)되었다. 그리고 그 포로들은 청군에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리는 혹형에 신음해야 했다. </p><p>호란 후에도 인조는 어렵사리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조선인 포로들의 통곡소리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p><p>●누가 안추원의 비극을 책임질 것인가? </p><p>1664년(현종 5년). 항복 후 27년이 지나 한 남자가 청에서 도망쳐왔다. 마흔한살의 안추원(安秋元)이 그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전 개성 부근에서 살았던 열세살의 소년 안추원은 가족과 함께 강화도로 피란했다. 하지만 이듬해 강화도가 함락될 때 그는 청군의 포로가 되었고, 선양으로 끌려갔다. 그는 선양에서 한족 출신 대장장이에게 팔린 신세가 되었다. 호란이 끝난 뒤, 포로로 끌려왔던 조선인 가운데 적지 않은 숫자가 몸값을 치르고 본국으로 송환되었다. </p><p>하지만 안추원은 그렇지 못했다.1644년 명이 멸망하자 청은 베이징에 입성한다. 베이징을 새로운 수도로 정한 청 조정은 선양의 거주민들에게 베이징으로 이주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스물한살이 된 안추원은 그의 주인에게 이끌려 베이징으로 들어갔다. </p><p>그리고 다시 18년이 지난 1662년(현종 3). 서른아홉의 장년이 된 그는 조선으로의 탈출을 결행한다.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여 만주 벌판을 가로질러야 하는 일생일대의 모험이었다. 하지만 산해관에서 청군에 붙잡히고 말았다. 베이징으로 송환된 그는 이마에 글자가 새겨지는 묵형(墨刑)에 처해졌다. 하지만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그의 비원(悲願)은 처절했다. </p><p>다시 2년이 지난 1664년, 안추원은 마침내 청을 탈출하는데 성공한다. 정확히 27년 만의 귀향이었다. </p><p>그가 사선을 뚫고 조선에 도착했을 때 조정은 고민에 빠졌다. 여전히 조선인 포로들의 탈출을 금지하고 있던 청의 존재 때문이었다. 하지만 27년만에 목숨을 걸고 탈출한 자국 백성을 어찌 차마 돌려 보내겠는가. </p><p>청이 알까봐 쉬쉬하는 가운데 안추원은 내륙으로 옮겨졌다. 안추원은 고향을 찾았다. 하지만 고향에는 아무도 없었다. 병자호란으로 그의 가족은 풍비박산 나고 말았다. 목숨을 걸고 다시 찾은 고향이었지만 그는 당장 생계조차 막막했다. 조정은 그를 받아주었을 뿐 생계대책을 마련해 주지는 않았다. 귀향의 감격도 잠시 뿐 배고픈 그에게 아무런 피붙이도 남아 있지 않은 고향은 그저 또 다른 이역이었을 뿐이다. </p><p>안추원은 절망 끝에 베이징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청으로의 귀환은 탈출보다 훨씬 위험했다. </p><p>1666년(현종 7). 그는 결국 고국을 탈출하려다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그가 어찌 되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처형되었을 것이다.2번이나 탈출을 시도했던 그가 온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p><p>●백성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 영의정까지 올라 </p><p>안추원의 이야기는 한편의 &lsquo;드라마&rsquo;와도 같다. 하지만 위정자들의 오판에 떠밀려 나락으로 떨어진 그의 비극은 과연 누가 책임져야 할까? </p><p>병자호란을 통해 수많은 &lsquo;안추원&rsquo;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lsquo;비극&rsquo;을 불러왔던 최고책임자인 인조는 왕위를 유지했고, 책임을 져야할 신료들의 상당수도 멀쩡하게 살아남았다. 전쟁 발생 사실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고 적과의 싸움마저 회피하여 국왕과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렸던 김자점은 인조 말년 최고위직인 영의정까지 올랐다. </p><p>오늘날. 병자호란의 참상을 떠올리면서 현실을 돌아본다. 꼭 10년전 &lsquo;IMF 외환위기&rsquo;가 불러온 칼바람 속에서 스러져갔던 수많은 민초들. 비극을 초래한 책임자들의 과실 또한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다. 수많은 생령들을 도탄에 빠뜨려 놓고도 자신의 과실을 책임지지 않는 정치인들의 &lsquo;무책임&rsquo;은 시공을 초월하여 유전되는 것일까. 비극의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내지 못하면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되풀이된다고 했던가? </p><p>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고 정치권의 난맥상과 민생의 어려움 때문에 걱정이 쌓여가고 있는 오늘, 370년전 병자호란의 비극을 되돌아보는 마음은 여전히 착잡하다. </p><p>&lt;한명기 명지대 사학과교수&gt; </p><p>●필자 한명기 교수는 </p><p>▲1962년생 </p><p>▲1985년 서울대 인문대 국사학과 졸업 </p><p>▲1997년 서울대 대학원 국사학과 졸업(문학박사) </p><p>▲1998&sim;2001년 서울대 규장각 특별연구원 </p><p>▲현재 명지대 사학과 교수. 계간 &lsquo;역사비평&rsquo; 편집위원 </p><p>▲논저 &lsquo;임진왜란과 한중관계&rsquo;(1999),&lsquo;광해군&rsquo;(2000) 외 다수</p>기사일자 : 2007-01-11    1 면]]></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역사]]></category>
            <pubDate>Sun, 15 Jun 2008 01:27:45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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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CDATA[[스크랩] 구름을 이용한 사진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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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scription><![CDATA[<P> </P>]]></description>
            <author>문희태</author>
            <category><![CDATA[주워온 사진]]></category>
            <pubDate>Fri, 30 May 2008 21:11:18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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